이희준 작가(이하 희작)의 극들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최후진술 초연부터 뜨문뜨문 보아왔으니 그렇게 오래, 많이 본 건 아니지만, 희작극이 그리는 인물들을 보며 나를 한 조각씩 발견하는 경험은 꾸준히 쌓였다. 창작하는 사람의 고민과 후회, 존재자체를 축복하지 않고 특정 조건에서만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세상에 대한 울분, 세상이 박수 치지 않는 사랑의 방식 등...
집에 손님이나 친구를 초대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남의 집에 초대받는 일도 없었다. 전쟁을 벌이는 이유도 몰랐지만 늘 전쟁이 벌어지던 곳, 그 곳이 집이었다. 안방과 거실 사이에 내가 있을 곳은 없어서 나는 책들이 가득 쌓인 도서관에 자주 가서 놀았고, 항상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애였다. 종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검은 글자들은 종종 손을 뻗어 나를 안아주...
아킬레스. 이 편지가 너의 손에 꼭 쥐어지기를. 하나만 기억해 줘. 비가 퍼부을 때, 번개가 칠 때, 달빛이 쏟아질 때, 종이가 나비 날갯짓처럼 뿌려질 때도 언제나 너의 노래가 들렸어. 멀리서 목소리나마 함께했다는 것. 나를 관통하는 피가 혐오스러운 날에도 감히 행복했어. 여기 있는 사람들과 너의 노래를 나눴고, 이제 이 사람들이 너를 기꺼이 도와줄 거야....
푸르스름한 새벽이 커튼에 드리울 때 즈음 올리버는 눈을 떴다. 또 거실 소파 위였다. 똑바로 몸을 가누지 못한 술병들이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뻐근했다. 올리버는 아직 잠이 붙은 눈을 꾹꾹 누르며 슬리퍼를 끌고 침실로 갔다. 퍽- 올리버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체온을 감싸주어야 할 침대는 싸늘했다. 공허와 새벽의 싸늘함에 눈이 ...
수현이 사는 집은 꽤 높은 곳에 위치했다. 좁게,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 인생의 어느 순간 낭떠러지를 만나 낮은 곳,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높은 곳에 모여 살았다.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르막이었다.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허락된 기회들과 순서는 늘 뒤로 밀려나기만 했고, 항상 내리막을 향해 가는 삶과는 반대로 그에게 허락된 공간은 높...
끝나지 않을 것처럼 사람을 할퀴어대던 겨울바람이 잦아든 사이로 봄은 슬그머니 스며들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날씨에 자잘한 빗방울로 톡, 하고 떨어지는 봄비는 사람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조금씩 새어나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괜히 길 가던 사람의 마음까지 간지럽혔다. 봄비가 지나간 후 부드럽게 풀린 바람. 그 바람을 따라 피어나는 꽃들. 봄이 오기 시작했...
비가 오는 날이면 모든 교실이 습하고 끈적거렸지만 B클래스는 특히나 더 심했다. 음식 냄새와 빗물의 비릿한 쇠 냄새가 들러붙어 기분나쁘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창 밖을 멍하니 쳐다봤다. 환이가 치는 피아노 소리와 치아키의 신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바로 옆이지만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땅을 향해 부서지는 빗방울들이 내는 규칙적인 소음은 쏟아...
올리버는 내게 잠 못 드는 밤이 많냐고 물었습니다. 답을 하자면 그래요, 많습니다. 늦은 밤, 새벽, 온 사방이 고요해지는 시간까지 잠 못들곤 깨어있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하루를 늦게 끝내는 사람들도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은 아직 나오지 않은 시간. 밤이 길거리로 뱉어낸 온갖 쓰레기를 부지런히 치우고 가는 거대한 차가...
올리버.올리버, 올리버.비는 끝없이 쏟아지고 우산 마저 무슨 소용인가 싶은 밤이기에, 이렇게 불러도 무슨 소용일까 싶은 당신의 이름을 한없이 씁니다.집에 오는 길, 이름을 마주했습니다.당신의 이름, 올리버, 서점의 진열장에서 발견한 이름.잊으려 묻어둔 기억이 파헤쳐지는걸 느꼈지만 당신의 책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한 나는, 완전히 당신을 잊고 지워낼 용기조차 ...
"올리버?" 조용한 집 안이 낯설다. 원래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집이라 최소한의 소리만 들리는 집이었지만. 올리버가 들어온 뒤로는 그렇지 않았다. 올리버가 이 집에 들어온 뒤로 필립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포근하고 고요했던 일상이 일렁이며 무지개 빛으로 집 구석구석을 수놓음을 매 순간 느꼈다. 일상이 새로운 빛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어제 저녁 동화책을 한 ...
"필립?" "올리버?" 공항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이 흔들리며 맞닿는다. 필립은 더 이상 올리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린다.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눈에 눈물이 맺힌다. 힘이 풀린 다리는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난다. "필립,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필립, 당신은 지금..." 올리버가 손이 어깨에 닿자 필립은 저도 모르게...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